UPDATED : 2025-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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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의 침묵, 전재원 씨의 한 가지 소망


심층기획 <법률선진·신문고>
기획을 시작하며 - 국정농단 사태로 ‘비정상의 정상화’가 시대의 화두가 됐다. 흐름에 맞춰 본지는 신문고(新聞鼓) 코너를 연다. 밝혀야 할 진실, 억울한 사정, 묻어두어야 했던 사연들이 언제든 찾아와 이 북을 두드리길 기대한다.


“설립자도 모르게 지워진 설립자 이름, 이제 그 이름을 경복대에 돌려놓으라”
   - 25년의 침묵, 전재원 씨의 한 가지 소망



□ “대학의 역사와 교육이념의 본래 뿌리를…”
“내가 바로 진짜 경복대 설립자입니다.”
 전재원(63․사업) 씨는 잔뜩 들고 온 문서를 하나하나 펼쳐가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결론부터 당겨 말하면 이날 그의 이야기는 “지난 25년간 지워졌던 대학 설립자 이름, 그 이름을 이제 되찾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경복대학교는 1992년 경기도 포천의 경성전문대학으로 시작해 1998년 교명을 경복대학으로 바꾸고 올해 개교 25주년을 맞고 있다. 지금은 간호보건계열로 특성화된 포천캠퍼스와 2006년 문 연 남양주캠퍼스(복지 예술 경영 교육)의 2원화 체제로 운영된다. 그 설립자는 지금까지 이 학교 전재욱(78) 명예총장으로 알려져 왔다.
 전 명예총장은 일찍이 경동대(강원도 고성 속초 문막 양주의 4개 캠퍼스 체제)를 설립해 현재 장남 성용(46) 씨가 경동대 총장, 차남 지용(45) 씨가 경복대 총장을 맡고 있다. 이와 함께 전 명예총장 집안은 수원의 동우고, 동우여고, 안성종합학교도 운영하는 사학(私學)가문이다.
 재원 씨는 이 같은 전 명예총장이 자기 형이라고 밝히면서 “대학의 설립자는 그 자체가 곧 그 학교 역사와 교육이념의 뿌리인데 경복대 학생들은 그 역사가 지워져 제 학교의 진짜 설립자가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한다”고 토로했다.


□ ”사실은 사실, 묻어둘 필요가 없다“
 … 애초에 잘못된 것을 알았으면 그때 법정투쟁이라도 해서 바로잡았어야지, 도대체 그 긴 세월 동안 왜 가만히 있었을까? 어제 오늘 일도 아니고 무려 25년이나 지난 지금 와서 새삼스레 문제를 들추는 이유는 뭔가? 그저 이따금 언론을 통해 불거지는 한 집안 재단싸움, 재산싸움 아닌가?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들이 떠오르는 가운데 기자는, 경복대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열어보았다. 사립대 홈페이지라면 으레 맨 앞에 나오게 마련인 설립자 인사말이나 소개란이 없다. 이를 지켜보던 재원 씨는 컴퓨터 화면을 프린트한 서류 한 장을 꺼내보였다. <20세의 도전! 프로의 세계를 지향하며…>라는 제목의 경복대 설립자 인사말로, 인물사진과 함께 ‘경복대설립자 법학박사 전재욱’이라고 쓰여 있었다. 재원씨는 “학교 홈페이지 맨 앞에 본래 이렇게 인사말이 실려 있었는데 언젠가 소리 없이 이를 내렸더라”면서 “바로 그 홈페이지 설립자란에 내 이름이 있어야 옳다”고 주장했다.
 재원 씨는 “그동안 한두 차례 제 이야기가 보도되기는 했지만 그저 피상적인 형제간 재단운영권 다툼으로 비쳐졌다”면서 “결코 무슨 주도권싸움, 재산싸움이 아니라 내 이름을 정당하게 되찾고 숨길 이유 없는 역사를 보여주려는 것”이라고 대못박듯 말했다. 형과 동생과 경복대. 재원 씨는 “그 사연은 한때 중견기업이었던 동성관광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 단 하루도 쉬지 않았던 일터, 동성관광
 재원 씨의 할아버지(전원팔, 작고)는 강원도 부자였다. 고성, 인제 등 일대에 땅을 많이 갖고 있었다. 부친(전선봉, 작고)은 평양의숙을 나와 의사가 됐지만 ‘나라를 위해 인재를 길러야 한다’며 교육사업에 더 뜻을 두어 속초고를 설립했다. 대학까지 세우기를 원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원 씨가 대학에 들어가던 1973년 작고했다. 이후 집안은 모친(황선분, 작고)과 장남 재욱 씨가 이끌었다. 열다섯 터울의 형 재욱 씨는 재원 씨에게는 가장(家長)이자 아버지와 같았다.
 국내 드물게 컴퓨터를 다루던 공군 전산실 요원으로 군복무 중이던 재원 씨는 1977년 이미 제대 6개월 전 포항제철, 현대 등 기업에 스카웃된 상태였다. 그런데 제대 석 달 전 형 재욱 씨에게서 연락이 왔다. “주산을 익혀 두고 제대하면 바로 우리 회사로 출근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재욱 씨는 관광운수회사(동성관광)를 경영하고 있었다. 모친 역시 “네가 형을 도와야 한다”고 했고 같은 해 10월25일 제대한 바로 그 다음날 재원 씨는 동성관광으로 출근했다.
 “관광운수업이란 게 빨간 날이 아예 없고 남들 휴일에 더 바쁩니다. 입사 첫날부터 꼬박 10년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전력투구했습니다. 하루하루 버스 숫자가 늘어나고 회사 규모와 사업영역이 커져가는 성취감이 제 행복의 전부였습니다.”이야기를 하는 동안 재원 씨는 이 ‘성취감’이란 단어를 예닐곱 번이나 반복했다.
 회사가 성장하는 동안 형 재욱 씨는 부친의 유지를 따라 1980년 학교법인(동성관광에서 이름을 따서 동성학원)을 설립하고 대학을 열었다. 속초시 노학동의 속초경상전문대학이다(이 학교는 속초전문대학―동우전문대학―동우대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2012년 지금의 경동대로 통합됐다).


□ 인생의 첫 성취, 동성관광의 성공
 그런데 속초 대학의 운영자금이 필요했는지 형 재욱 씨가 돌연 회사를 매각하겠다고 했다. 동생 재원 씨가 입사한 지 10년째 되던 1986년 7월이었다. 회사일이든 집안일이든 대소사 결정권을 가졌던 재욱 씨의 생각이라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체 회사에 애착이 컸던 동생 재원 씨는 “생판 모르는 남보다는 차라리 내게 회사를 넘겨 달라”고 형에게 제안했다.
 “버스와 회사 자산을 다 합쳐 5억5천3백만 원으로 계산하고 거기에 당좌대출금 6천만 원까지, 총액 6억1천에 동성관광을 제가 인수했습니다. 그 대금으로 현대해상화재에서 2억8천, 조흥은행에서 1억을 빌려 먼저 3억8천을 냈습니다. 나머지는 5천만 원 어음과 이후 3년간 1억6천여만 원 분납 등 형님에게 회사인수 대금을 모두 지급했습니다. 형님이 직원들 앞에서 이를 공식 발표했고 제가 동성관광 주인이 됐습니다.”
 재원 씨가 회사를 인수할 당시 동성관광은 버스 41대에 매출규모 업계 20위권이었다. 재원 씨가 이를 인수한 뒤 회사는 5, 6년 만인 1990년 초반 버스 75대에 업계 3위권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재원 씨가 사장이 되어 회사경영을 맡은 1986년에서 1991년까지 동성관광은 월평균 2억 원을 벌어들이는 캐쉬카우(cash-cow)였다.


□ 두 번째 성취, 대학 설립
 모든 것이 순조롭던 1987년 어느 날, 형 재욱 씨가 어디선가 교육부의 ‘수도권 대학신설 방침’이야기를 들었던 모양이다. 재원 씨에게 돌연 “발전 전망이 무궁무진한 수도권에 대학을 설립하자”고 제안했다.
 이른바 ‘문어발 학교장사’를 금지하던 당시 교육부 방침 때문에, 기존 속초에 대학(동우대)을 운영하던 형 재욱 씨가 수도권에 대학을 신설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형님이 저에게 ‘네가 나서서 대학을 설립해라’ 얘기를 꺼냈죠. 아버님 때부터 교육사업을 중시했고 또 이미 형님도 대학을 운영하던 터인 데다 집안 분위기가 형님의 생각이라면 믿고 따르던 터여서 저도 공감했습니다.”
 재원 씨는 두말 않고 땅과 돈을 내놓았다. 동성관광을 경영하면서 장차 캠프장 사업을 하려고 몇 년 전 미리 사두었던 포천 신북면(현 경복대 포천캠퍼스)의 땅 14만 평 등 50억여 원을 출연했다. 재산만 내놓은 게 아니라 법인설립에서 대학 개교까지 재원 씨가 일을 맡아 추진했다.
 “학교운영 경험을 가진 형님 쪽 사람 S씨와 함께 온갖 일을 다 했죠. 최종심사차 정부실사단이 현장에 왔을 때, 포천교육청에서 정부 관계자와 포천시 유지 등 3백여 명 앞에서 제가 직접 대학의 설립취지와 이념, 개교까지 실행계획을 브리핑했습니다. 동성관광 일도 해야 했지만, 나도 이제 사람을 길러내는 교육자가 된다― 들뜬 성취감으로 내달렸죠.”
 일을 추진한 지 1년여 만인 1988년 이윽고 교육부에서 학교법인 동성학원(경성전문대학) 설립허가가 나왔다. 다시 3년 준비과정을 거쳐 1992년 3월 학교가 문을 열었다. 정부의 설립허가를 받으면서 임원명단을 놓고 형 재욱 씨는 재원 씨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설립자는 네 이름으로 해도, 너는 아직 젊으니(당시 재원 씨는 37세) 재단이사장을 어머니로 올리자, 그러면 당신 이름도 학교에 남고 나중에 돌아가신 뒤 교정에 동상(銅像)이라도 세울 수 있으니 얼마나 좋겠느냐,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저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고 어머니를 생각하는 형님의 그런 제안이 오히려 반가웠습니다.”
 이렇게 해서 교육부의 설립허가서에는 ‘설립자―전재원, 초대이사장―황선분’으로 등재됐다. 모친과 재원 씨를 포함해 모두 8명 이사와 2명 감사가 임원명단에 올랐다(사진‧교육부의 1991년 2월7일자 시행 「학교법인 경성전문대학 설립허가서」참조). 재원 씨는 “경성대가 문을 연 것은 동성관광의 성공적 경영과 함께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성취였다”고 회상했다.


□ 경영주도 몰랐던 회사매각
 형 재욱 씨는 표면상 경복대 쪽에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학교 운영은 역시 이미 경험을 쌓은 재욱 씨가 지휘했다. 재원 씨는 “형님이 든든하게 받쳐주었고 또 돈이 많이 필요한 대학운영을 위해서라도 나는 더 열심히” 동성관광의 경영, 특히 국내는 물론 해외사업 확장까지 진력했다. 그러는 동안 안 보이는 데서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을 알지 못했다.
 “대학설립 초기여서 많은 자금이 필요했는지 사장인 나도 모르게 형님이 동성관광을 다른 기업에 매각했어요. 나중에 알고는,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죠.”
 교육부의 법인설립 허가 이후 개교 준비가 한창이던 1991년의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경영주도 모르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다른 집들도 그렇겠지만, 저희 집안 전통도 재산문제다 경제문제다 하는 일들은 가장에게 전권(全權)이 일임돼 있었죠. 신뢰와 우애를 바탕으로 형님이 동성관광 대표이사 인감 등 제 도장은 물론 모친과 누나(전재은), 심지어 매형의 인감도 모두 갖고 있었거든요. 그 도장들을 가지고, 당시 동성관광 경리부 간부 B씨를 회유해서 저 모르게 절차를 밟아 회사를 매각한 겁니다.”
 재원 씨는 이렇게 해서 자신이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한 직장이자 15년 동안 몸바쳐 키운 회사를 잃게 되었다.
“그 엄청난 일을 제가 얼마나 까맣게 몰랐느냐 하면 ‘동성관광이 K고속에 팔렸다’는 언론보도를 보고서야 알았으니까요. 도대체 매각계약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얼마에 팔렸는지 계약서를 지금까지도 보지 못했습니다. 매각대금이 어떻게, 어디로 쓰였는지도 모르고요 3년 쯤 뒤에, 앞서 형님 편에서 그 일을 맡았던 B씨가 비로소 이야기해줘서 그나마 내막을 좀 알게 됐죠.”
 이미 버스가 떠난 뒤였지만, 일이 다 끝난 뒤였지만, 도대체 내 회사가 얼마에 팔렸나, 궁금해 하던 재원 씨는 군복무 때 동료였던 정몽윤 사장(현대해상화재)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이 회사 경리팀이 추정한 당시 동성관광의 자산 가치는 76억 원이었다.


□ 설립자도 모르게 지워진 설립자 이름
 실의 속에 재기를 모색하던 1993년 봄, 학교 쪽에서 재원 씨에게 연락이 왔다. 재욱, 재원 씨 형제와 흉금 없는 사이였던 당시 김상호 부학장이 “학교 일을 맡아 달라”고 재원 씨에게 요청한 것이다. “학교운영 문제로 재단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형님이 미국으로 나갔죠. 김 부학장이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는 재욱 씨가 돌아오지 못할 터이니 그동안 학교 일을 맡아줘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비록 자신의 회사마저 잃게 만든 형님이었지만 재원 씨는 “설립자로서 그리고 현직 재단이사로서 흔들리는 학교 경영을 외면할 수 없어” 기획실장직으로 학교운영에 참여했다. 그러나 2년쯤 뒤 또 다시 재원 씨를 경악하게 하는 일이 드러났다. 학교법인의 임원명단에서 설립자인 자신의 이름도 이사 직위도 다 지워져 있었던 것이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죠. 1995년 봄 우연히 ‘재단임원에서 해임됐더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재원 씨가 곧바로 확인해보니 자신이 이미 3년 전인 1992년 7월29일자 자진퇴임한 것으로, 또 모친도 이미 1년여 전인 1994년 1월12일, 역시 자진 퇴임한 것으로 돼 있었다. 재원 씨 자리에는 형 재욱 씨의 부인 고순자(나중에 개명해서 고희재) 씨가 이사로, 모친의 후임으로는 조병두라는 이름이 이사장으로 등재돼 있었다. 법인 설립 당시 재원 씨와 함께 임원명단에 있던 다른 이사들도 이미 다른 이름으로 바뀌어 있었다.
 “대학법인 임원의 해임, 취임사항은 이사회 의결, 교육부 승인 등 그 절차가 간단치 않습니다. 회의록도 보존해야 하고 해임사유도 분명해야 합니다. 그런 터에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이 감쪽같이 진행됐는지 저도 어머니도 기절할 일이었지요. 당장 저도 그렇고 어머니도 그렇고 무엇 때문에 자진퇴임을 하겠습니까. 새로 이사장으로 등재된 조병두는 당시 학교와 아무 관계도 없고 아예 제가 모르던 사람입니다.” 재원 씨의 이 같은 이야기는 모친의 생전 진술에서도 나타난다.
<장자 전재욱은 …재단법인 설립자인 동생 전재원의 승낙을 얻어 본인(황선분)을 초대 이사장으로 앉힌 뒤 1994년 1월12일 동생이나 본인의 아무런 승낙이나 양해도 없이 본인을 이사장직에서 해임시켰습니다. …설립자인 전재원은 물론 내 의사와 전혀 무관하고 또한 이사회 소집 등 적법절차도 거치지 아니한 채 장자 전재욱이 일방적으로 처리했습니다. (1995년 4월13일자 모친의 진술 공증문서)>


□ 형과의 합의각서, 그러나…
 앞서 형 재욱 씨의 결정으로 동성관광을 잃었을 때도 묵묵했던 재원 씨였지만 자신은 물론 모친의 이름까지 걸린 일이어서 이번에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군을 제대한 그날부터 그때까지 19년 동안 형의 뜻에 따라 자신이 해냈던 일들을 소상히, 20여 쪽 장문의 편지로 써서 재욱 씨에게 보내 서운함을 나타냈다.
 “소리 나게 난리를 친다거나 법적인 다툼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형님을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진심을 먼저 밝히고 형에게 조목조목 섭섭함을 토로했습니다.” 그러자 형 재욱 씨가 손을 내밀었고 두 사람은 대화를 통해 합의각서(1996년 1월 공증)를 작성했다.
 …향후 6개월 내 재원 씨가 경기도 수원의 동원고, 동우여고 이사장으로 근무하게 한다. 앞서 부친이 남긴 재산들 가운데 인제, 고성 등지의 부동산을 법적 상속지분에 따라 재원 씨에게 나누어준다. 단, 재원 씨는 동성학원의 설립과 경성대 설립과정, 이사회의 구성과 해임 등에 대해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형 재욱 씨에게서는 어떤 조치도 없었다. 오히려 이 합의각서는 이후 설립자 이름을 되찾으려는 재원 씨의 발목을 잡았다.
 “당사자도 모르게 이사장 및 이사 해임이 이루어진 만큼 정부 당국에 관련 민원을 제기하던 터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저한테 돌아온 건 아무것도 없는데 형님은 그 합의각서를 벌써 당국에 제출했더군요. 양자 간 이래저래 합의해서 모든 일이 원만하게 끝났다, 남들한테 그렇게 보이도록 일을 만든 겁니다. 그 바람에 제가 나중에 정부에 제기한 민원들이 ‘이미 종결사항’으로 처리되기 일쑤였습니다.”
 달라지는 것 없이 시간만 갔다. 그런 동안 형 재욱 씨의 이름이 1997년 2월17일 법인이사 명단에 올랐다. 앞서 모친 대신 취임했던 조병두 이사장도 이때 해임되고 고순자 이사장이 취임했다. 이어 1998년 이후 학교법인 동성학원이 경복학원으로, 경성전문대학이 경복대학으로 바뀌었다. ‘전재원의 흔적들’은 사라졌다.


□ “원망도 다툴 생각도 없다. 다만…”
 속절없이 지켜보던 재원 씨가 할 수 있었던 일은, 다만 공식문서들을 증거자료로 학교 설립자가 자신임을 입증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교육부와 정부합동민원실에 경복대의 최초 법인설립허가서, 이사의 퇴임과 취임, 관련 회의록 등 제반서류 공개를 요청했다. 그러나 ‘문서 원본이 있는 학교에 문의하라’거나 ‘종결사항’이란 답변들만 돌아왔다. 그렇게 무려 8년여 만에, 그것도 정권이 바뀌고 국민고충처리위원회가 발족한 뒤인 2007년 1월에야 재원 씨는 관련문서들을 받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다시 10년이 지났다.
 그런데 의아하다. 애를 써서 관련문서들을 입수했으면 그때부터라도 본격, 가령 민형사 소송 등을 벌일 수 있었을 텐데 왜 이후로도 오랫동안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어머니 앞에서 형제가 다투는 모습을 절대로 보이지 않으려 했습니다. 두 번째는 저 동생이란 놈이 학교나 재산이 욕심나서 저러는가, 남들에게 오해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집안 송사는 뭐가 어떻든 결국 누워 침뱉기니까요. 셋째, 아무리 섭섭하다 해도 형님은 일찍부터 집안 어른이자 내게는 아버지나 같았습니다. 언젠가는 형님이 맺힌 것들을 다 알아서 풀어줄 것이다, 믿었습니다.”
 이미 학교법인도 학교이름도 다 바뀐 상황, 학교는 ‘경복대’로 자기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대학재단과 학교현장의 모든 사람들도 형 재욱 씨 사람들로 채워져 왔다. 인간적, 도덕적 정당성을 따진다 해도 원체 많은 시간이 흘렀다. 현실의 법인도 학교이름도 바뀐 지금 법적 타당성이 있을지도 의문이다. 기자가 다시 “끝까지 가만히 있는 게 더 나은 것 아닌가, 왜 굳이 지금 와서 문제를 제기하느냐”고 묻자 재원 씨는 기사스크랩 하나를 내보였다. 이미 지나간 2015년 11월23일자「경기북부뉴스」 보도였다.

<검찰, 경동·경복대 납품업체에 거액뒷돈 수사>
경기 양주와 남양주, 포천, 강원도 지역에 6개 대학 캠퍼스를 운영 중인 사학재단 일가가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
대구지검 서부지청은 최근 경기 포천과 남양주에 캠퍼스를 운영 중인 경복대 전지용 총장과 그의 친형 전성용 경동대 총장을 리베이트 수수혐의로 소환해 조사를 진행했다.
이들 전 씨 형제는 경복대와 경동대에 전자칠판을 납품한 (대구의) K업체로부터 7억 원과 2억 원의 뒷돈을 각각 받은 혐의다. 검찰은 전 씨 형제 이외 경동대와 경복대 재단의 설립자인 전재욱(76) 명예총장을 함께 소환했다 ….

 재원 씨는 “그동안 언론에 형님의 대학운영 관련 문제, 특히 경복대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남의 일 같지 않았다”며 “대학 경영자가 다른 일들에 쫓겨 경황이 없으면 학교운영이며 학생교육, 또 당장의 학교이미지는 어떻게 되겠는가. 경복대가 점점 잘 되기 위해 이제 학교의 뿌리와 역사부터 바로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기자에게 반문했다.
 이야기 말미, 재원 씨는 “지금도 나는 형님을 원망하거나 다툴 생각이 없다”고 했던 말을 반복하고는 “동성관광과 경복대가 내 인생의 소중한 두 가지 성취라는 점을 형님이 이제라도 살펴서 그 설립자 이름을 꼭 되살려 달라고 인간적으로 부탁하고 싶다”면서 일어섰다.  / 권채빈 ‧ 편집위원
(※ 본란의 내용은 사연자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풀어갑니다. 그 주장 및 내용에 대한 정당한 이견 또는 반론 역시 가감 없이 게재할 것을 독자들에게 약속합니다.)

 기자 : 권채빈    작성일 : 17-0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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